* 흐린 날이다.
예전엔 시간과 상관없이 잠을 잘 잤던 것 같은데…
언젠가부터 촬영이 없는 날에도 마음 편하게 잠을 잘 수 없게 되었다.
침대 위에서 이불을 뒤집어 쓴 채로 뒤척거리다 머리맡에 올려둔 폰을 집어든다.
메시지와 이메일을 체크.
촬영도, 마감도, 급한 수정 연락도 없는 평화로운 날.
가끔 들어가는 사이트 게시판에서 별 의미 없는 글들을 몇 갠가 눌러 보고는 다시 폰을 엎어 놓는다.
발치에 고양이가 느껴진다.
침대 위의 나이든 고양이는 사람이 발로 치더라도 버틴다.
발로 몇 번, 머리나 등 쪽을 슥-슥- 문질러 보지만 고양이는 아랑곳 하지 않고
그대로 누워서 눈을 감고 있다. 이쯤 되면 관록인가.
오늘은 출근 하지 말까..
엎드린 상태로 고양이 등에 발을 대고 있다가 한참을 미적거린 후에 일어선다.
냉동실에서 얼음 트레이를 꺼낸다.
트레이에 남아 있는 얼음은 두 개.
냉동실 안 쪽에 놓인 얼음 틀을 하나 꺼내 양 옆을 잡고 비튼다.
시끄러운 소리를 내면서 트레이에 얼음이 떨어진다. 몇 개는 툭툭 쳐야지 떨어진다.
그리고 생수병을 꺼내 얼음 틀 한쪽부터 서서히 붓고는 얼음 틀을 기울인다.
각각의 홈에 가득 차도록 물을 부으면 나중에 얼음이 얼었을 때
서로 붙어서 완벽한 형태의 사각 얼음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한쪽부터 물을 붓되 적당한 양으로, 기울였을 때 고르게 퍼질 수 있도록
전체 물 양을 조절 하는 것이 포인트다.
-라고 집중하며 생각하지만 이 때가 지나고 나면 이런 생각을 다시 떠올리지 않지 보통.
냉동실 안쪽에 있는 얼음 틀 하나도 마저 비우고 물을 채울까 하다가 그만둔다.
미리 해두는게 효율적이지만 오늘은 왠지 귀찮은 기분이다.
플라스틱 텀블러에 얼음을 채우고는 캡슐커피 머신을 켠다.
몇 년은 풍족하게 먹을 꺼 같던 캡슐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남아있는 캡슐은 ROMA와 KAZAAR, LINIZIO LUNGO 몇 개.
사실 각각의 맛을 음미하면서 고른 다기 보단 강도의 기능성(?)으로 고른다.
오늘처럼 멍청해지기 쉬운 날은 좀 진한 아이로.
ROMA로 커피를 두 번 내리고 물을 조금 부어서 텀블러 가득하게 커피를 만든다.
대충 씻고는 모자를 뒤집어쓰고 만들어둔 커피를 들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간다.
짧은 그림자의 햇빛을 보고는 출퇴근이 불규칙한 직업이다- 라고 생각한다.
아파트 단지에서 출근시간이 아닐 때 나서게 되면..
주변의 이상한 시선이 느껴질 때도 있는데
‘아, 사실 어제 새벽 늦게 촬영이 끝나서요.
오늘은 오후부터 촬영이라 조금 늦게 출근하는 거예요’ 라고 말하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차림새를 본다면 누구도 일하러 간다고 생각하지 않겠지.
커피를 컵 홀더에 놓고 시동을 켜고 음악을 고른다.
오늘은 음… shuffle calm 폴더.
Polaris, Fishmans, Ego-Wrapping, Gotan Project,
올드보이 OST, 김윤아 솔로 앨범, 버스정류장 OST,
글렌 굴드, 아라베스크 등등이 있는 폴더.
USB에 넣어둔 음악을 바꿔야지, 바꿔야지 한지가
한참이 됐는데 벌써 몇 년째 같은 음악들이다. 어쩌면 평생 갈지도 모르겠다.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와 신호를 몇 갠가 지난 후 올림픽대로로 접어든다.
출근길의 러시아워가 지난 시간이라 정체가 좀 덜 하겠지 했지만 여전히 차가 많다.
새벽녘이나 아니고서는 늘 막히는 길이다. 이제는 뭐 익숙하다.
좋아하는 음악 몇 가지는 다시 듣기도 하고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음악은 넘기기도 한다.
릴리슈슈의 모든 것 OST중에 ‘아라베스크의 노래(アラベスクのうた)’ 같은 곡.
호흡과, 아라베스크 앨범 둘 다 매우 좋아하지만 이 곡은 좋아지지 않는다.
지워버려야지 한지가 벌써 몇 달은 된 것 같지만 여전히 남아 있다.
올림픽대로에서 빠져 나와서 다시 몇 번인가 신호를 지난 후 시내로 진입한다.
그런데 차들의 움직임이 이상하다.
앞쪽을 보니 어떤 차 한 대가 교차로 한가운데 멈춰있다.
정체 중에 신호가 바뀌어서 애매하게 멈춘 듯한데, 위험해 보인다.
신호가 바뀐 쪽 차들이 교차로 한가운데 멈춰 있는 차
앞, 뒤쪽으로 아슬아슬하게 비켜 지나가느라 흐름이 엉망이다.
어떤 차는 지나가며 신경질적으로 경적을 울리기도 한다.
‘아! 좀!! 이러면 어떡해요?!’ 라는 느낌.
상황을 모른 채 앞쪽으로 끼어든 차들로 도로는 점점 더 엉켜 가고 있다.
곧 신호가 바뀌고 그 차를 피해 지나가고 있는데 큰 소리가 들렸다.
처음엔 음악 소린가 싶었는데 뭔가 크게 외치는 사람 목소리.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민트색 레이 운전자는.
8차선 교차로 한가운데서 멈춘 채로.
그렇게 지나가는 모든 차들에게 큰소리로 사과를 외치고 있었다.
* 카메라는 콘탁스 T3, 필름은 후지 C2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