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주하고 시끄러웠던 사무실이 점점 소리가 줄어든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 졌다.
“이게 마지막 물량이예요?”
“네 두 번 확인 했어요. 내일 출고되는 것이 올해 마지막 수출 분이예요”
“고생 많으셨어요. 퇴근 하세요”
“네 대표님 수고하셨습니다.”
내일 오전 업체 미팅에 쓸 샘플을 하나하나 확인하고 마지막까지 사무실에 남아있는 직원이 건네는 인사를 뒤로 하고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돈이 많다고 해도 바뀌는 건 별로 없어.
젊은 시절 그런 이야기를 떠들어 댄 적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럴싸한 말처럼 들리지만. 사실 그렇지 않아.
많은 것들이 달라진다.
분명. 그렇다.
생각을 하다 내 차를 지나치고는 다시 돌아서서 차로 향한다.
아빠가 은퇴 후 타던 차와 같은 모델. 년식만 최근 것이다. 아무래도 익숙한 것을 찾게 되나보다. 그 차가 왜 좋은지 아빠에게 외울 정도로 들었으니까.
사실 차는 굴러가고 음악만 잘 나오면 되니까 뭐든 상관없다.
이전에 타던 차도 전혀 불만이 없었지만 계속 말썽을 일으켜 어쩔 수 없었다.
엔진인지 구동인지..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지만 점검을 자주 받지 않아 그렇다고 했다.
작고 귀여운 차였지. 이미 폐차했지만 대시보드 위의 노호혼 화분은 지금의 차로 옮겨왔다.
뒷 좌석에 백을 던져두고
운전할 때 들을 음악을 고르고
볼륨을 올리고 출발한다.
coldplay – spies
사무실에서 10여분 정도. 집은 멀지 않다.
키로 문을 열고 구두를 벗고 한쪽으로 넣어둔다.
백을 식탁 쪽에 올려두고 소파에 쓰러지듯 눕는다.
이사 온지 여러 달이 지났지만 아직 집이 낯설다.
일이 너무 정신없이 많아서 집에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가 직접 하지 않은 인테리어라 남의 집에 와서 사는 듯 한 기분이 든다. 인테리어 전문 디자이너가 만든 집이라 깔끔하고 고급스럽긴 했지만 아직 내 집 같이 느껴지진 않는다.
옷을 갈아입지 않은 채 소파에 누워 생각한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하나, 하나의 일들이 지나 갈 때는 큰 감흥이 없었다.
아니 없다고 생각했다. 그냥 그 순간순간에 충실했던 것 같은 느낌이다.
어느새 돌이켜 생각해보니 짧지 않은 순간들이다.
갑자기 너무 적막한 느낌이 들어 음악을 튼다.
조원선 1집 swallow.
집에는 TV가 없다.
엄마 일을 본격적으로 돕기로 결심하고 가장 먼저 한 일은 집에 있던 TV를 없애는 것 이었다.
볼 수가 없었다.
나의 선배. 동료. 후배. 친구.
그들을 TV에서 볼 자신이 없었다.
스무 살. 동기들에 비해 이른 데뷔를 했다. 동명의 소설과 영화가 있는 뮤지컬.
빛나는 순간. 이라고 생각했다. 물른 빛나도록 열심히 했었지.
하지만 공연은 언젠가는 끝이 나고.
예상보다 빠른 데뷔와 나에 대한 관심은 주변의 시샘과 질투 그리고 여러 가지 감정의 응어리들로 남았다.
그 후 연극, 뮤지컬, 드라마, 단역, 조연, 몇 번인가의 커머셜 필름, 그리고 영화에도 몇 작품인가 출연했다. 꽤 큰 영화에서 알려진 배역을 맡기도, 몇 작품인가에서는 주연을 하기도 했다.
꿈 같다.
지금으로선 그때 일들을 떠올리면 현실감이 없다.
한 가지 역을 위해 몇 달 동안 조선족 말투를 쓰거나, 이름도 생소한 격투기를 배우거나, 지방 촬영 때문에 새빨간 조명이 달린 러브호텔에서 한 달 동안 지내기도 했었다.
좋아하던 스쿠터를 타고 프로덕션을 돌며 프로필을 돌리던 시절도 있었지.
-그중에 대부분은 산더미 같은 A4 프로필 종이들 사이로 파묻혀 사라졌겠지만.
항상 재밌는 일만 있던 건 아니었어. 생각 자체가 이상한 기획사 대표를 만나기도 하고 꽤 시청률이 나오는 채널 드라마 PD들과 어색한 저녁 식사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일은 재미있었지만 사람들이 너무 힘들었다. 사람들 사이에 안 좋은 일들이 계속 겹쳐 일을 중간에 쉬기도 했다. 그러다가 다시 마음을 잡고 몇몇 작품을 재밌게 하기도 했지만… 너무 힘들어졌다. 오디션을 보기에 마음상태가 점점 어려워졌다.
그러다 처음엔 기분전환 하는 마음으로 엄마의 일을 몇 번인가 도와드리게 됐는데 생각보다 소질이 있었던 모양이다. 꽃을 만지는 것 자체도 좋아 했지만 그것보다 사업을 키우는 재능이 있었다. 엄마가 하던 꽃 관련 사업도 사이즈가 작은 건 아니었지만 몇 번인가의 결정적인 타이밍을 잘 잡게 되어 예전에 비해 수십 배로 규모를 키울 수 있게 되었다. 그 후 중국과 베트남 쪽에도 거래처를 트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확장하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회사를 몇몇 분야에 따라 나누게 되었고 정신을 차려보니 회사를 총괄하는 자리에 있게 되었다.
천장을 보며 계속 생각에 빠져 있다가 눈을 잠시 감는다.
그리고 눈을 뜬다.
보통 사는 이야기는 이런 식이야.
지나고 나면 중요한 건 다 없어져.
그 누구도 내게 일러주지 않았어.